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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이야. 어기면 바늘 오천개 먹기. 알아?"
"뭐야, 그게. 살벌해."

*

오노 사토시는 답지 않게 고급 정장을 입었다. 오노의 친구 니노미야의 통큰 협찬이었다. 오노에게 맞춘 깔끔한 정장과 구두. 멋지지만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는 평소의 오노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목늘어난 반팔티에 운동복 바지, 발뒤꿈치를 접고 질질 끌어 신는 운동화 차림의 오노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말큼 이 모습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그래, 사실 오노 사토시는 미남이다. 그것도 능력 좋은 미남이었다. 유명 화가에다 특유의 캐릭터로 예능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물론 오늘만큼 꾸미는 날은 거의 없었다. 특별한 날에만. 그에게 잘보여야 해, 라며 오노는 꾸몄다. -이렇게 길게 서술한 내용을 간결히 말하자면 한 문장으로 간추릴 수 있었다.

"평소에도 좀 그렇게 하고 다녀라."

니노미야가 시원한 향기의 향수를 뿌리는 오노에게 말했다.

"사람같은 꼴 좀 하고 다녀. 이 아저씨야."
"니노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오노가 니노미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겨자색 티져츠 그만 입어. 고급 정장 파는 놈이 말이야. 몇년째 질리지도 않고 입고다니는 티셔츠를 인질 삼아 오노가 맞받아쳤다. 그에 니노미야는 할말이 없는지 자신의 겨자색 티셔츠를 내려다보다, 결국 자폭을 시전했다.

"난 애인 없으니까 괜찮아."
"니노, 울지 말고 말해..."

안 울어, 나쁜 놈아. 니노미야가 팔로 눈가를 가리며 우는 시늉을 했다. 오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

오노는 미리 예약해 놓은 꽃다발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신의 친구인 아이바의 꽃집으로 향했다. 화려하지만 단정하고 돈지랄 한거 같지만 소소하게 부탁해. 그런 오노의 주문에 아이바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너무 개같은 주문이라 못알아 들었어. 뭐라구? 블랙 아이바 등판에도 오노는 당당히 자신의 요청을 밀고 나갔더랬지. 그 덕에 3일만에 본 아이바는 초췌해져 있었다. 다크서클이 입꼬리까지 내려온 아이바는 보기도 싫다는 듯이 붉은 장미와 안개꽃의 꽃다발을 내밀었다. 백송이의 붉은 장미 사이사이의 하얀 안개꽃의 다발과 수수하지만 고급스런 포장은 얼추 오노의 리퀘스트와 맞아 떨어졌다. 물론 까다로운 오노의 마음에는 딱 맞아 떨어지질 않아 꿍한 얼굴이 되었지만.

"부장."
"아이바, 내가 분명..."
"나가줄래."

피곤한 얼굴로 겨우 웃으며 오노를 내쫒은 아이바가 급하게 가게 문을 닫았다. 쫒겨난 오노는 차문을 열며 소중하게 꽃다발을 뒷자석에 올려놓았다. 물론 꿍한 얼굴로 툴툴거리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

차 안이 장미향과 향수의 향으로 가득 찰 때 쯤, 오노는 화려한 인테리어의 가게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출발하기 전 오노는 이 휘황찬란한 가게의 오너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를 잘 두라는건 이런거지. 오노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게에 발을 디뎠다.

「Chocola. J」

"아, 오노 군. 이거 가져가면 돼."

그저 문을 열었을 뿐인데 강렬한 얼굴이 오노를 반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게의 수많은 여성들의 시선도 한순간 오노를 향했다. 구석에서 오노 사토시야, 봐봐. 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잘생긴 사람은 잘생긴 사람끼리 친구구나. 그런 말도 들리는 것 같아 오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마츠준에게 끌리지 않는다면 오늘은 성공이 분명했다. 오노는 마츠모토가 미리 빼놓은 Chocola. J의 최고 인기 스페셜 세트를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오노 군, 오늘 프러포즈 한댔었지?"
"응. 쇼군 좋아해주겠지?"
"글쎄, 우리는 너의 그 쇼군을 모르니까."
"좋아하게 될거야. 그러니까 못 보여줘."
"됐네요. 친구의 애인 뺏을 생각 없어. 어쨌뜬, 건투를 빌어."

마츠모토가 멋진 미소를 지으며 오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오노는 당연한걸 말하지 말라며 웃었다.

*

오노는 사쿠라이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장거리 연애도 이런 장거리 연애가 없지. 오노는 조수석에 미리 놓아둔 다이아몬드 실버링을 보며 실실 웃었다. 쇼군이 좋아해줄까. 사쿠라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오노가 행복한 고민을 했다.

오노와 사쿠라이가 만난 곳은 오노의 본가 근처의 숲속이었다. 1년에 한번, 늦은 밤. 그 숲은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와 연결 된다. 전설이었다. 오노의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전설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사쿠라이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장미나 안개꽃이 없고, 자동차 대신 마차가 다니는. 밤 하늘을 나는 고래가 은하수를 지나고, 사쿠라이가 있는 세계였다.

"매년 이 날. 이 나무 앞에서 만나자. 약속이야. 어기면 바늘 오천개 먹기. 알아?"
"뭐야, 그게. 살벌해. 약속할게, 사토시. 사토시도 약속 지켜야 해? 15년간. 매년 이 자리에서 만나는거야."

15년. 그래, 올해가 15년째였다. 전설은 저편의 세계나, 오노의 세계나 같았다. 숲 속에서 만난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15년간 매년 만나면, 그 다음 생에 이루어진다는. 그러나, 죽을때까지 더는 만나지 못한다는 삼류 로맨스에 쓰일 법한 전설이었다. 그리고 그 삼류 전설에 매달리는 오노와 사쿠라이가 있었다.

*

"쇼군! 여기야!"
"사토시...!"

사쿠라이가 환하게 웃으며 오노에게 다가왔다. 해가 진 하늘은 보랏빛이었다. 사쿠라이의 손에는 사쿠라이가 땄을 별이 램프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15번째 보는 사쿠라이는 오노의 기억보다 아름다웠다. 사쿠라이는 램프를 내려놓고 팔을 벌렸다. 오노는 밝게 웃으며 사쿠라이를 안았다. 사쿠라이의 등이 떨렸다. 울보인 오노보다도 사쿠라이는 먼저 울었다.

사쿠라이의 울음이 진정되자, 오노는 사쿠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쿠라이를 살짝 떼어 놓았다. 포옹도 좋지만, 중요한 본론이 하나 있었다.

"쇼군, 우리 매년 여기서 만나자고 했잖아."
"응..."
"올해가 마지막이고, 우린 환생해서야 보는거잖아."
"...."
"그러니까 약속 하나 더 하자. 어기면 바늘 오천개. 알지?"
"알아. 바늘 오천개... 그래서 뭘 약속하는건데?"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오노는 급하게 숨겨놓았던 꽃다발과 반지 케이스를 들고왔다. 멀뚱멀뚱 오노를 바라보던 사쿠라이는 얼결에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나랑 결혼해. 연애도 하고, 첫사랑도 나랑 해. 약속이야, 쇼군."
"...사토시."
"약속 안지키면."
"바늘 오천개. 알지?"

사쿠라이가 웃으며 답했다. 오노가 울음을 터뜨렸다. 밤은 깊었다.

*

동이 트기 시작하자, 사쿠라이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물 탓이라며 변명을 해보기에는 오노의 왼손 약지에는 다이아몬드 실버링이 끼워져 있었다. 사쿠라이의 하얀 손에도 끼워져 있을 단 하나의 증표였다.

*

"...저기!"
"네?"

오노는 헉헉거리며 자신의 옷깃을 잡은 남자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아마, 나 지금껏 찾던 사람을 찾은 것 같아.

"나랑 한 약속 안 잊었지. 약속 어기면."
"...바늘 오천개."

오노의 귀가 붉어졌다. 고개를 든 사쿠라이의 볼도 붉었다.


-오노쇼 전력 '약속'을 주제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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